간디와 남아프리카로의 여정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각성과 인권 운동의 시작은 인도가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893년, 간디는 영국령 인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했다. 당시 인도인은 남아프리카에서 소수 집단으로 차별받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인종차별적 법과 관행이 존재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 경험
- 피터마리츠버그 사건 (1893년):
- 기차의 1등석 티켓을 구매했지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제로 하차당했다.
- 이 사건은 간디가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호텔, 법정 등에서의 차별
- 호텔에서 숙박을 거부당하고, 법정에서도 변호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일상적인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인도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인권운동의 시작: 나탈 인도인 회의(Natal Indian Congress) 창설
1894년, 간디는 **나탈 인도인 회의(Natal Indian Congress, NIC)**를 창설했다.
- 인도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 영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법적 차별을 줄이려 했다.
NIC는 남아프리카 내 인도인 사회의 결속을 다지고, 단체 행동을 조직하는 기반이 되었다.
비폭력 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의 탄생
1906년, 남아프리카 정부는 인도인들에게 신분증(패스법, Pass Law)을 강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이는 인도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도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 간디는 이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의 힘)’**를 조직했다.
주요 사티아그라하 운동
- 1907년~1913년: 인도인 등록법 반대 운동
- 인도인들에게 강제적으로 신분증을 발급하려는 법에 반대해 대규모 저항을 이끌었다.
- 간디와 많은 인도인들이 체포되었지만, 끝까지 평화적으로 저항했다.
- 1913년: 트란스발(Transvaal) 지역의 탄광 노동자 파업
- 인도인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발해 파업을 벌였다.
- 간디는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을 조직하며 인권운동을 확산시켰다.
- 1913년: 톨스토이 농장(Tolstoy Farm) 설립
- 간디는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어, 운동가들이 자급자족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 여기에서 공동체 생활과 비폭력 저항을 실천하며 후계자들을 양성했다.
남아프리카 인권운동의 성과
- 1914년: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일부 차별법을 폐지했다.
- 인도인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안 통과
- 인도인의 인두세(세금) 폐지
하지만 여전히 완전한 평등을 이루지는 못했고,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은 계속되었다.
인도 독립운동과의 연결고리
- 1915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인도로 돌아갔다.
-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의 독립운동을 비폭력 저항으로 이끌었다.
- 훗날, 인도의 독립을 위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Non-Cooperation Movement)**이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인권운동의 역사적 의미
- 간디의 정치적 성장의 출발점
- 비폭력 저항의 초석 마련
- 남아프리카의 반인종차별 운동과 넬슨 만델라에게 영향을 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적 발언
간디는 1893년부터 191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활동하며 인도인의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가 흑인(African)들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
-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을 위해 싸우면서도, 흑인들과는 다른 대우를 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당시 그는 “인도인은 문명화된 민족이며, 야만적인 카피르(Kaffirs,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와 같지 않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간디는 인도인을 위해 백인과 같은 지위를 주장했지만, 흑인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남아프리카에서는 간디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문제적 태도
간디는 **금욕(Brahmacharya)**을 강조하며 독특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
- 그는 성욕을 극복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과 나체로 함께 잠을 자는 실험을 했습니다.
-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카딸을 포함한 여성들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 간디는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영적 수행의 일부라고 주장했지만, 윤리적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 특히 오늘날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으로 간주됩니다.
훗날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도 간디의 철학을 계승해 남아공의 인종차별(Apartheid) 철폐 운동을 전개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의 개념을 정립했다.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남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권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훗날 인도의 독립과 남아프리카의 민주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엔터테이먼트.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 신비주의자_그레고리 라스푸틴 (Grigori Rasputin, 1869~1916) (5) | 2025.04.02 |
---|---|
폭삭 속았수다~_드라마 세트장 후기 (15) | 2025.04.01 |
고급 유리의 혼을 넣는_이탈리아 무라노 유리 (4) | 2025.03.28 |
분위기 있는 저녁에 음악_"Tonight's the Night (Gonna Be Alright)" - 로드 스튜어트 (Rod Stewart) (11) | 2025.03.28 |
우스꽝스런 사랑 노래_Silly Love Songs - 폴 맥카트니 & 윙스 (1)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