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독립 운동_무스타파 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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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 초상화

지루한 내용일 수 있지만 1919년 터키는 무스타파 케말에 독립운동의 해가 된다.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고 유럽 열강의 압박과 내부 부패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오스만 제국은 1918년 휴전 협정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해체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장군으로서 활약하다가, 민족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터키의 독립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됩니다.

몰락하는 제국

1919년,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존재만 유지하는 허울뿐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스탄불은 연합국의 점령 하에 있었고, 서부 지역은 그리스 군대가 진주해 있었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이에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연합국과 협력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달랐습니다. 그는 제국의 붕괴를 지켜보며, 터키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5월 19일, 케말은 흑해를 건너 삼순에 도착합니다. 이 날짜는 오늘날 터키에서 '청년과 스포츠의 날'로 기념되고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시작점입니다.

아나톨리아로 향한 희망

삼순에 도착한 무스타파 케말은 곧바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군사적 경험과 지도력으로 지역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소규모로 흩어져 있던 저항 세력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 결과, 1919년 6월에는 아마시아에서 발표된 아마시아 순명를 통해 민족의 독립이 국민의 결의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전국에 전파하게 됩니다.

이 선언은 터키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문서로, "국가의 독립은 국민의 의지와 결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핵심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 1919년 7월에는 에르주룸 회의, 9월에는 시바스 회의가 열리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조직이 형성됩니다. 이 회의들을 통해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국민의 대표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 정부와는 다른 ‘터키 민족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됩니다.

이 회의에서는 터키 땅은 분할될 수 없다, 외세의 간섭은 거부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으며, 민족주의 정당이자 이후 터키 공화국의 기반이 되는 **"아나톨리아와 루멜리 방위 협회"**가 설립됩니다.

이후 1920년, 무스타파 케말은 앙카라에서 새로운 의회인 대국민의회를 수립합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정부와는 별도의, 완전히 독립적인 정치 기구로, 사실상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의회는 독립 전쟁을 주도하며, 무스타파 케말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그는 이후 그리스군을 몰아낸 전투, 프랑스, 이탈리아와의 외교 전선, 1921년의 사카르야 전투, 1922년의 대공세 등을 통해 외세를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마침내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터키의 독립이 승인됩니다. 같은 해, 터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무스타파 케말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이후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무력 저항이 아니라, 국민의식과 민족 정체성 회복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혁명이었습니다. 오늘날 터키가 세속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남긴 정신과 리더십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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